[OSEN=백종인 객원기자] 얼마 전이다. 26년 된 일본 MBS의 장수 프로그램 ‘정열대륙(情熱大陸)’이 화제였다. 2회(12월 22~23일) 연속 방영분의 주인공은 스즈키 이치로(51)였다.
관찰 카메라 형식으로 진행되는 화면이다. 특성상 제작진은 미국 시애틀로 이치로를 찾아갔다. 녹화 시기는 지난 여름(8월)이다. 거기서 (시애틀 매리너스) 구단주 특별 보좌역의 하루 일과를 카메라에 담았다.
일단 출근부터 함께 한다. 집에서 출발하는 시간이 오후 1시 무렵이다. (야간 경기일 기준) 선수 때나 비슷하다. 본인이 직접핸들을 잡는다. 홈구장 T-모바일 파크(예전 세이프코 필드)까지는 30분 거리다.
구장에 도착하면 라커룸으로 향한다. 아직도 자기 칸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선수나 코치들이 쓰는, 크고 잘 꾸며진 곳은 아니다. 외진 구석의 작고, 약간은 허름한 느낌의 방이다.
“여긴 배트 보이와 볼 보이가 쓰는 곳이다. 본래는 위에(선수들 쓰는 곳) 준비해 주겠다고 했는데, 괜히 겁이 나기도 하고, 분위기를 흐릴 것 같아서…. 이곳이 편하다. 아주 좋다.” 그렇게 웃으면서 옷을 갈아입는다.
이윽고 그라운드로 달려간다. 늘 그렇듯이 1착이다. 선수들은 아직 출근 전이다. 텅 빈 외야에 나가 러닝으로 땀을 뺀다. 그러기를 한참, 드디어 특타조가 나온다. 배팅 연습이 시작된다. 딱~ 딱~. 경쾌한 타격음이 울려 퍼진다.
이때부터는 역할이 바뀐다. 공 줍기다. 넓은 외야의 절반은 그의 몫이다.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니며 날아오는 볼을 잡아낸다. 아마 촬영을 의식한 것 같다(?). 한 번씩 화려한 묘기도 선보인다. 글러브를 등 뒤로 돌려서 캐치하는 현란함을 과시한다.
“이게 운동량은 가장 많다. 1시간을 채우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재미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게 해 준) 구단에 정말 감사하다.” 땀투성이가 된 특별 보좌역의 환한 표정이다.
물론 ‘공 줍기’가 업무의 전부라고 말하면 곤란하다. 조금 더 수준 높은 일도 한다. 현역 슈퍼스타인 J-로드(훌리오 로드리게스)가 달려온다. 통역도 없이 한동안 대화를 주고받는다.
“난 어릴 적에 이치로를 보며 자랐다. 그의 배팅을 흉내 내며 놀았다. 그런 위대한 선수의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는 늘 ‘자신감을 잃지 말라’고 강조한다. ‘주변의 의견은 달라질지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바꾸지 말라.’ 그런 가르침이다.” (J-로드)
그라운드 일을 마쳤다. 그렇다고 업무가 끝난 것은 아니다. 라커룸으로 가서 장비를 정리/정돈한다. 글러브를 닦고, 왁스도 발라준다. 스파이크도 마찬가지다. 바닥에 묻은 흙까지 브러시로 깔끔하게 닦아낸다. 오래된 루틴이다.
“미국 선수들은 이런 것 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난 이렇게 해야 기분이 좋아진다. 도구를 아끼고, 소중히 다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남는 게 없다는 생각이다.” (이치로)
그리고 서둘러 실내 훈련장으로 이동한다. 역시 선수들이 나오기 전에 써야 한다. 피칭 머신을 돌리고, 타격 훈련에 돌입한다.
단거리 타자는 선입견이다. 맞추기에 급급하는 훈련은 없다. ‘으아~’. 끓어오르는 비명 같은 소리가 연신 터져 나온다. 스윙 하나하나에 기합이 들어간다. 그야말로 100% 전력을 쏟아붓는 느낌이다.
이어진 다음 장면이다.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화면의) 컷이 넘어가고, 새로운 모습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포수용 장비를 챙긴 이치로다. 두터운 미트를 끼고, 다리 보호대를 장착했다. 그리고는 제대로 앉아서 투구를 받아낸다. 꽤 안정적인 포구 자세다.
사실 현역 선수라도 포수는 어렵다. 엄청난 빠르기와 현란한 변화를 모두 감당해야 한다. 삐끗하면 손가락을 다치고, 손목이 돌아갈지도 모른다. 허벅지, 배, 가슴에 멍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비록 연습이라도 손사래 치기 일쑤다.
그 역시 다를 리 없다. 내내 심각한 표정이다. “포수 어려워, 어려워” 하는 소리가 입에 붙는다. “존경스럽다”는 말도 저로 나온다.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받는 동작만이 아니다. 필딩(수비 훈련)도 알아서 한다. 흐르는 볼을 줍기 위해, 베이스 커버를 위해. 달리고, 슬라이딩하고, 송구하는 동작까지 몇 번을 되풀이한다.
은퇴한 지 5년이 지났다. 나이가 50이 넘었다. 구단주 특별 보좌역이라는 버젓한 직함도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지켜보던 제작진이 궁금해한다. “좀처럼 일어날 것 같지도 않은 일을 위해 왜 이렇게 열심히 하나.”
그의 대답이다.
“예전에 그런 적이 있었다. 불펜에 있는데 누군가 묻더라. 잠시 투수들 공을 좀 받아줄 수 있겠냐고. 그런데 그때 ‘못한다, 안된다’고 말하기가 싫었다. 그건 절대로 싫다. 그래서 미트와 장비를 마련하고, 연습도 시작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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