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영화평론가 김종원, 『제주영화사』로 밝혀낸 제주도 최초 극장 ‘창심관’과 ‘목포의 눈물’ 이난영 남매의 이야기
OSEN 홍윤표 기자
발행 2024.12.31 14: 56

[OSEN=홍윤표 선임기자] “돌앙보난 이게 언제라./ 난생 처음 써본 사랑 핀지 보내놓곡/ 가슴 설랭인 초싱달 밤 그 집 앞/ 그때의 그뭇은 이제 찾아볼 수 어신디/ 머리가 다 시어버린 나이에도/ 무사 영 부치러와점신고”(김종원의 시 ‘올레-제주 사투리로 쓴 시-’ 첫 련)
‘살아 있는 한국 영화평론계의 전설, 한국영화사 연구의 권위자.’ 제주 출신 등단 시인 1호인 김종원(金鍾元. 87) 원로 영화평론가에게 으레 따라붙는 수식어다. 그가 이번에는 영화연구의 정점을 찍은 『제주영화사』(한상언영화연구소 발행)를 펴냈다. 『제주영화사』는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제주도의 영화와 역사, 인물’을 뭉뚱그려 갈무리해놓은 ‘제주도의 영화의 발자취이자 그 이야기’다. 이 책은 그가 고향인 제주도에 바치는 헌사나 다름없다.
“돌아보니 이게 언제던가(…) 그때의 자취는 찾아볼 수도 없는데”라는 그의 회고 시의 한 구절처럼 흔적도 사라지고 자취도 가뭇한 제주도의 영화사를 ‘혼신의 필력’으로 기어코 한 권 책으로 완성한 김종원 영화평론가의 ‘노익장’이 놀랍다. 더군다나 지난해(2023년) 회고록 『시정신과 영화의 길』, 시집 『시네마 천국』(이상 한상언영화연구소 발행)을 잇달아 펴냈던 터에, 미처 숨돌릴 틈도 없이 그의 고향 영화 이야기마저 가뿐하게 정리해낸 것이다.

김종원 선생은 “내가 제주영화사를 쓰게 된 데는 평소 이에 대한 관심이 있기도 했지만, 장기간 제주영상위원회의 이사로 있으면서 로케이션 활성화를 위한 중단편 시나리오와 영상물 및 지역영화제에 대한 심사를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제주영화사』는 “제주도의 경우 극장이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영화는 언제부터 상영되었는지 그 출발점을 명확히 밝히기 쉽지 않다. 객관적으로 입증할 만한 기록이 없어 겨우 구전이나, 당사자와 가까웠던 인사의 회고담을 통해 들을 수밖에 없었다”는 그의 증언대로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해방 이전 전라남도의 행정구역이었던 제주에서 영화가 처음 상영된 시기는 1922년 순회 활동 사진대에 의해서였다. 1903년 조선에 활동사진이 들어오고 한국영화의 원년으로 평가받는 활동사진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1919년 단성사에서 첫 상영 된 후 3년이 지난 때였다.
1923년부터 민간 중심의 활동사진 상영회가 열렸고, 1930년에는 일본인이 제주 최초의 극장 ‘창심관’을 개관했다. 활동사진과 공연을 주로 했던 창심관을 통해 데뷔한 가수가 바로 ‘목포의 눈물’ 이난영이었다.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은 창심관에서 영어교사였던 김성택과 함께 변사 노릇도 했다.
김성택은 1930년대 일본 오사카에서 나운규 감독의 ‘사랑을 찾아서’ 변사로 나섰다가 흥분한 나머지 한국말로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바람에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고 필름을 압수당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던 인물이다.
제주 출신 최초 영화인인으로 평가받는 김성택은 1970년대 가요계의 신데렐라로 등장,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당신은 모르실 거야’의 가수 혜은이(본명 김승주)의 이버지이기도 하다.
『제주영화사』는 영화의 도래와 정착,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모색기, 영화 불모지에서 양지로, 산업화 시대의 변화, 전성기 맞은 제주의 영화 순으로 연대기 별로 인물과 극장, 영화작품을 씨줄과 날줄로 흥미롭게 엮어냈다.
김종원 선생은 1965년 창립된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발기인이자 3대 회장을 역임했고, 한국 영화계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청룡영화상 정영일 영화평론상(1994) 1회 수상자, 한국예술발전상 1회 수상자(2001),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공로예술가상(2007), 영평상 영화인 공로상(2020) 등 굵직한 영화 관련 상을 받았다. 『제주영화사』는 한상언영화연구소와 손을 맞잡고 펴낸 회고록과 시집에 이은 역작이다.
이미지 제공=한상언영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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